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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서 만난 태조왕건

탐사보도/김포에서 만난 태조 왕건

금동반가사유상->도선대사->태조왕건-신숭겸장군 가문
태조왕건, 자신 구하고 전사한 신숭겸장군 가문에 하사

국내학자 ‘국보 금동 미륵반가사유상 축소형’ 7세기 작품
일본학자 ‘삼국시대 불상 국립박물관 國寶보다 앞설 수도’


7세기 초반 삼국시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국보급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을 김포에서 어렵게 만났다.

금동반가사유상은 1400년전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이 소장했던 불상으로 서기 927년 대구 팔공산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개국공신 신숭겸장군(평산신씨 시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신씨문중에 하사된 것으로 전한다.

태조왕건과 신숭겸장군에 대한 일화는 역사를 통해 잘 알려져 있으나 불상에 관한 얘기는 역사속에 간단하게만 전해지다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상을 소장하고 있는 평산 신씨 34대손인 신복철씨(65)씨는 “반가사유상은 도선대사가 태조왕건에게 도선비기와 함께 삼국을 통일하라고 전한 것인데 이를 가문에 하사해 가보로 전해져왔다”고 전했다.

김포와 왕건의 관계를 어렵게 찾자면 당시 왕건의 선조가 개성을 주 무대로 한 해상세력으로서 경기만 일대는 주요 활동지였다. 그리고 1400년이 흘러 김포에서 만난 조그만 불상을 통해 고려건국과정의 인물들을 만난다.<편집자 주>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927)은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했다.

서기 927년 후백제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경상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회군하여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한 고려태조 10년.
당시 신라왕(제55대 경애왕)은 종친과 신료들과 포석정에서 놀이를 벌이다 견훤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태조왕건 목숨과 맞바꾼 불상
왕건은 견훤의 침략 소식을 듣고 견훤을 치기 위해 경주로 향하지만 견훤은 이미 경주에서 퇴각한 뒤였다.
왕권은 공산무주(대구의 팔공산), 지금의 동화사(棟華寺) 자리에 진을 치고 초기엔 견훤을 맞아 공산동수에서 격파하지만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 왕건의 군대가 포위된다.

병력적으로 열세였던 고려군은 대패하게 되고 태조 왕건과 장수들은 견훤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허사로 돌아가게 되고 신숭겸의 충심어린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위기의 순간, 태조 왕건과 얼굴이 흡사했던 신숭겸장군은 전쟁이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대신 죽을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수래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은후 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 전사한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의 시신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 창에 꿰어 물러난 후 공격의 형세가 허술한 틈을 타 태조는 단신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본진으로 돌아와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는 신숭겸 장군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때 대장 유금필 등이 "신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 하고 시신을 확인할 수 있는 몸의 징표를 알려주어, 이를 근거로 장군의 시신을 찾게 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왕건은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게 하니 마치 생시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조복을 갖추어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통곡하였으며, 신숭겸장군은 도선대사가 태조 왕건의 묘터로 정한 광해주 소양강 비방동(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禮葬)됐다.

당시 왕건은 개국공신 신숭겸의 머리를 순금으로 만들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순금으로 만든 이것의 도굴을 막기위해 그 묘를 평안도 3기, 해도 3기, 강원도 춘천 서면에 3기 등 모두 9기를 봉안했다.
그리고 신숭겸의 자식들에게 극락왕생을 빌어주라며 당시 왕이 소유하고 있던 약 3백년된 금동불 반가여래상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감정위원 ‘동시대 걸작품 수준’
불상은 높이 22.5㎝, 머리 높이 5㎝, 어깨 부분 너비 5㎝, 가슴 부분 너비 4㎝, 대좌(臺座) 높이 7.5㎝, 대좌 아래쪽 지름 9 x 12.2㎝로, 전형적인 반가좌(半跏坐) 상태로 사유(思惟)하고 있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을 형상화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는 구부려 발목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오른손을 오른쪽 볼에 대고 생각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간결한 뫼 산(山)자 모양 관인 삼산관(三山冠)을 썼으며 별 다른 장식은 없다.

목에는 두 줄 목걸이를 장식했으나 양쪽 팔에는 팔찌 등의 장식은 없다.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이다.

전 한국고미술협회 금속감정위원 박덕남씨는 “금동 미륵보살반가상은 연륜이 짙은 전체 표면의 변화에서 인위적인 점을 발견할 수 없으며 재질 또한 고 청동임이 확연하며 유연한 조형과 아름다운 조각과 선은 동시대 걸작품 수준이다”면서 삼국시대 조성된 희귀한 작품으로 감정했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자료는 미술사 관련 학술단체인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제22호 불교미술사학자인 정영호(鄭永鎬. 71)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이 학계에 공개한 바 있다.

이런 불상 양식에 대해 정 박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일명 덕수궁미술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와 흡사함을 느끼게 한다"면서 "우선 상반신이 나형(裸形)인 점과 삼산(三山) 모양으로 보관(寶冠)을 간결하게 한 점, 원만한 상호(相好)와 두툼한 눈두덩이 등의 고식(古式)임이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박사는 "불상 크기만 소형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국보 금동 미륵반가사유상의 축소형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이번에 공개하는 불상은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으므로 제작 시기 또한 같은 7세기 초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고 덧붙였다.


평산신씨 가보 34대 신복철씨 소장
정 박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평산신씨 문중에 가보로 전해오던 것으로 한 때 화재를 만나 피해를 본 흔적이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정 박사는 "금색이 상호(相好)와 동체에 조금씩 남아있고 대부분의 금도금이 퇴색되고 부분적으로 유연한 조각들이 다소 거칠게 보이는 문제 등에 대해서는 좀 더 과학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니어처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해 올해초 일본 불교미술사학자의 감정이 나온 바도 있다.

일본 사가와(佐川)미술관 상무이사 관장대행 가와다 사다무(河田貞)씨와 도쿄국립박물관 상좌연구원 미쓰우라 마사아키(松浦正昭)씨는 “금동보살반가상을 육안 관찰 결과, 6세기말-7세기초에 제작된 삼국시대 불상으로 볼 수 있다”고 감정했다.

이들이 제출한 감정 결과서는 전북지역 역사고고학 전공자들이 최근 창간한 계간 잡지 '역사와 문화'를 통해 원문과 함께 번역문을 동시 수록됐다.

신복철씨 소장품인 이 불상에 대해 가와다씨는 "소박한 삼산식(三山式) 보관을 쓰고 약간 우울한 느낌을 더한 채 목을 약간 기울이고 오른손으로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어 붙였으며, 왼발을 내리밟고 탑좌(걸상다리)로 앉은 특징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흡사하다"면서 "두 불상 중에서도 신씨 소장품이 시기적으로 약간 앞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마쓰우라씨 또한 이런 점을 지적하면서 "고류지 소장 보관미인보살상과 동일 계열에 속하며, 이 상이 한국에서 조상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작품이라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다만, 가와다 씨는 이런 결과가 단기간에 그리고 외견적인 관찰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불상의 진정한 가치는 "동시기에 제작됐다고 간주되는 다른 불상과의 주조기술이나 금속성분의 과학적 비교분석 등을 통해 복수의 연구전문가가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곽종규 발행인

<사진/불상이 다소 검게 변한 것은 신복철씨 집에 화재가 발생, 불상이 보관됐던 창고가 소실되면서 이런 형태로 변하게 됐다.>

곽종규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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