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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章陵)과 연관된 석정리(石井里) 돌우물(石井)의 전설(1)

[강경구 前시장의 우리고장이야기- ⑪ 대곶면 석정리(石井里)]

김포시청에서 48번국도를 따라 강화방면으로 약 10km 정도 가다보면 누산삼거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해 양곡을 거쳐 강화 초지대교 방향으로 또 10km정도가면 대명항 진입로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 우회전해 북쪽방향으로 약 4km 지점에 석정초등학교가 있고, 그 앞쪽에 돌우물(石井)이 있다.


석정리의유래

석정리는 조선중기까지는 통진읍 고리곶면 읍정리였다가 16대 인조(仁祖: 1632년) 이후부터 통진현 석정리라 칭했던 것이라 추정된다. 석정리(石井里)는 석정(石井)과 산곡(山谷) 두 개 마을로 나뉘어 있다. 산곡(山谷)이란 마을은 원래 무인촌(無人村)이었으나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과 축산업자들이 터전을 잡게됐고, 그 곳에는 탄광이 있었다.

석정(石井)이란 마을은 글자 그대로‘돌우물’이라는 뜻이다. 석정리의 주산(主山)인 오봉산(五峰山) 석회암층에 연결된 암반 속에서 솟아나오는 약수로서 동네의 식수는 물론 수량(水量)이 많아 못자리 등 농업용수까지 사용해 왔으며 빨래터로도 유명했다. 또한 그 물맛이 좋아서 조선시대 통진현(通津縣)이 지금의 월곶면(月串面) 군하리에 있었는데 고을원님이 그 물을 길어다 먹었다해 ‘골(고을)우물’이라고 불러왔다.

옛날에는 돌우물(石井)앞까지 서해(西海) 바닷물이 들어와서 돌우물 앞에 있던 대추나무에 배를 정박시키려고 묶어놓았다는 얘기로 보아서 교통수단으로도 사용했겠지만 어민들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돌우물(石井)의전설

이 ‘돌우물’에는 장릉(章陵)과의 얽힌 전설이 있다. ‘장릉(章陵)’은 조선조 16대 임금 인조(仁祖)의 부친인 추존왕(追尊王) 원종(元宗)과 동비(同妃)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능(陵)이다.
원종(元宗)은 선조(宣祖)의 제5자 정원군(定遠君)으로 인빈(仁嬪) 김씨(金氏)의 소생(所生)이다. 선조 13년 탄생(誕生)했고 선조37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봉(封)해졌으며 광해 즉위후 왕의 박해(迫害)로 우울한 생활을 하다가 광해11년 춘추 40세로 승하(昇遐)했다. 반정(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대원군(大院君)에 추상(追上)됐다가 인조 10년 대왕(大王)으로 다시 추존(追尊)됐다. 인헌왕후(仁獻王后)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13세에 가례(嘉禮)해 연주군부인(連珠君夫人)으로 봉(封)해지고, 인조반정 후 부부인(府夫人)으로 진봉(進封)되고 원종과 함께 왕후(王后)로 추봉됐다. 인조4년(1626년) 춘추 46세로 승하했다.

처음에는 양주(楊州) 곡촌리(谷村里)에 있던 묘를 인조 5년(1627년)에 개장해 김포시청 뒤 북성산(北城山: 지금의 장능산)으로 이장(移葬)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고 인조10년(1632년) 봉릉(封陵)해 장릉(章陵)이라 했다. 양주(楊州)에서 이곳 김포 장릉(章陵)으로 이장(移葬)할 당시 장릉에 와서 역사(役事)할 때 광중(壙中)을 파니 많은 샘물이 솟구쳐 하관(下棺)을 할 수 없게 돼 야단이 났는데 유명한 지관(地官)의 말이 서북쪽 40리 밖에 돌우물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가서크게 파헤치면 이 곳의 물이 마를 것이라 해 지관이 시키는대로 수맥(水脈)을 따라 석정리(당시는 갯벌이었다 함)에 도착해 돌우물(石井)을 크게 파헤치니 돌 틈에서 많은 수량이 터져 나와 그 결과 장릉(章陵)의 광중(壙中)에서 솟던 물이 멈춰 능(陵) 역사(役事)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돌우물(石井)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큰 바위와 바위사이에서(규모: 약 20여평 원형넓이에 3m 깊이) 지금도 샘물이 가득차게 샘솟고 있다.

<석정리 2편은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강경구 前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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